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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를 보는 창_칼럼(column)걸작선

< 에로영화 스타 젖소 부인과 소설가 이문열의 관계는-?>_논객 혹은 검객 진중권 선생

by 진순정 2014. 9. 13.

  국민학교(現 초등학교)시절에 책은 읽고 싶은데_도서관도 없고,돈이 없을 때-

신문을 읽는 것을 낙으로 살았다._신문을 공짜로 보는 재미가 쏠쏠~~

특히, 연재 소설(간질맛나는)과 시론 그리고 문화 부문 (部門)은 아침에

두근두근하게 하는 핫 아이템...

 지금도 버스나 전철을 탈 때, 항상 신문을 사고, 내가 좋아하는 부문 (部門)만 읽는다.

개인적으로 "명 시론 및 칼럼"을 포스팅하여 가끔씩 다시 보는 것도 의미가

있다고 생각해서 한 번 시도를...

 '펜은 칼보다 강하다' - 에드워드 불워 리턴 (위키백과)의 '아르망 리슐리외'작품 중에서..

'아르망 리슐리외'라는 알렉상드르 뒤마 _(위키백과)의 삼총사 (위키백과)에서 나온

못된 추기경으로 유명....

 

리슐리외 추기경 아르망 장 뒤 플레시 (위키백과)_실제로는 유능한 외교가로 평가.

  '펜은 칼보다 강하다'라는 말에 어울리는 검객_'진중권 선생'의

_중앙일보, 2000. 2. 10
[시론] 이문열과 ''젖소부인''의 관계? *** ''홍위병을 돌아보며'' 쓴 이문열 씨에 말한다_

진중권 선생을 논객보다는 '검객'이라고 볼 수 있는 "명 시론"이라고 생각...

중앙일보, 2000. 2. 8
[시론] 홍위병을 돌아보며
▲ 이문열 <작가>

지도자가 기존의 정치체제 안에서 충분한 권력기반을 확보하지 못하면 외부의 힘에 유혹을 느끼게 된다. 60년대 중국 대륙을 폭력과 유혈(流血)로 휩쓴 홍위병(紅衛兵)은 공산당 지도부 장악에 자신이 없어진 마오쩌둥(毛澤東)이 체제 밖의 힘을 끌어들여 자신의 권력을 유지 내지 강화하려고 조직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홍위병이 주도한 문화혁명(文化革命)에 대한 평가도 반드시 일치하지는 않으나 일반적인 견해는 있다. 그 운동이 중국 사회를 분열시켜 수백만의 인명이 살상됐으며, 지식인 탄압으로 중국 문화를 수십년 후퇴시켰다는 비난이다. 毛를 사랑하는 대부분의 중국 사람들도 그의 유일하고 중대한 실책으로 흔히 문화혁명을 든다.

그런 부정적인 평가가 아니더라도 총선시민연대와 그들이 호소하는 선거혁명을 두고 홍위병과 문화혁명을 떠올리는 것은 온당치 못한 일이 될는지 모른다. 우선 홍위병은 위로부터 시작된 조직이었지만 총선연대는 아래로부터 시작된 조직이며, 문화혁명은 피를 동반한 관제(官製) 운동이었지만 선거혁명은 무혈(無血)의 시민운동이기 때문이다.

또 끊임없이 나도는 음모설(陰謀說)에도 불구하고 현재까지는 정부나 여당이 총선연대의 조직과 활동에 개입했다는 뚜렷한 증거는 나오지 않았을 뿐더러 시민단체의 선의(善意)를 의심할 근거도 없다. 그들이 내건 대의(大義)는 누구도 대놓고 부정하기 어렵고, 많은 사람들은 그런 그들의 활동을 오히려 필요하고도 시의적절한 것으로 본다.

그런데도 총선연대 시민단체의 활동을 보면 자꾸 홍위병을 떠올리게 되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 그것은 아마도 그들의 활동이 이제 시작이며, 정말로 중요한 전개와 변화는 앞날에 남아 있기 때문일 것이다.

자민련과 공조가 깨지면 집권여당은 불가피하게 체제 밖에서 힘을 끌어들여야만 한다. 그런데 이미 절로 만들어진 조직이 있으니 그 조직을 활용하고 싶은 유혹을 억제하기 어려울 것이다.

시민단체 쪽도 그렇다. 출발의 선의와 무사(無私)를 믿는다 쳐도 그 일관된 유지는 아무도 장담할 수 없다. 쌀에는 뉘가 섞여들게 마련이다. 더구나 대중운동의 장(場)은 시장 못지 않게 그레셤의 법칙이 자주 적용되는 곳이다. 거기에다 기준의 설정과 적용에 요구되는 공정성을 확보하는 일도 쉽지는 않을 것이다.

벌써 일부 지방에서는 총선연대의 낙천자 명단이 오히려 그 지역에서는 당선자 명단으로 통하고 있다고 한다. 의식의 차이라고 무시하기에는 너무도 섬뜩한 현상이다. 총선연대의 공천반대 기준에는 지역감정의 조장이라는 항목이 있는 걸로 알고 있는데, 이 경우에는 오히려 총선연대의 활동이 지역감정을 조작한 꼴이 된 셈이다.

총선연대의 기준이 너무 윤리적,감성적 측면만 강조하고 있다는 점에도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들이 많다. 선거는 유능한 정치인을 뽑는 것이지 깨끗하고 착한 시민을 상 주는 것이 아니다. 예견력,결단력,종합관리능력 따위의 너무 실제적이고 효율적인 정치생산만을 기준으로 국회의원을 뽑는 것도 문제지만, 청렴이나 의리 같은 윤리적 덕목만을 강조하는 것도 올바른 투표권 행사를 유도하는 일은 못된다.

거기에다 만약 총선연대가 출발할 때의 신선함을 유지하지 못하고, 집권여당이 그들을 활용하고 싶은 유혹을 끝내 떨쳐버리지 못한다면 총선연대는 한국판 홍위병에 지나지 않고, 그들이 외친 선거혁명은 질 낮은 문화혁명이 되고 만다. 이런 점에서 총선연대나 집권여당이 스스로를 경계해야 함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시민들도 눈을 부릅뜨고 그들 양쪽을 모두 지켜봐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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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일보, 2000. 2. 10
[시론] 이문열과 ''젖소부인''의 관계?
*** ''홍위병을 돌아보며'' 쓴 이문열 씨에 말한다
▲ 진중권 <문화평론가>

"끊임없이 나도는 음모설(陰謀說)에도 불구하고 현재까지는 정부나 여당이 총선연대의 조직과 활동에 개입했다는 뚜렷한 증거는 나오지 않았을 뿐더러 시민단체의 선의(善意)를 의심할 근거도 없다. (...) 그런데도 총선연대 시민단체의 활동을 보면 자꾸 홍위병을 떠올리게 되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 그것은 아마도 그들의 활동이 이제 시작이며, 정말로 중요한 전개와 변화는 앞날에 남아 있기 때문일 것이다."

며칠 전 소설가 이문열이 바로 이 자리에서 한 말이다.

음모론. 한 정당의 대변인을 졸지에 코미디계의 황제로 등극시켰던 이 조잡한 얘기가 그의 말대로 항간에 "끊임없이" 나돌고 있다. 왜 그럴까? 나는 음모론을 퍼뜨리는 사람들이 그것을 정말로 믿어서 주장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설마 한 나라를 이끌어나가시는 분들이 그 정도로 머리가 나쁘겠는가? 거기엔 아마 다른 이유가 있을 게다. 즉 거짓말도 참말과 똑같은, 아니 때로는 그것보다 더 큰 정치적 효과를 내기 때문일 게다. 게다가 히틀러의 말대로 "대중들은 작은 거짓말보다 큰 거짓말에 더 잘 속는" 법이다.

< 에로영화 스타 젖소 부인과 소설가 이문열의 관계는-?>

이런 제목의 기사는 대중을 즐겁게 해준다. 설사 그 기사가 "아무 관계도 없다"는 허탈한 내용을 담을지라도 말이다. 혹시 이를 비난하는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다. 그 경우에는 표현을 슬쩍 바꾸면 된다. 가령 이렇게. 젖소부인과 이문열 사이에 내연의 관계가 있다는 "뚜렷한 증거는 아직 나오지 않"았다. 즉 두 사람의 관계는 한마디로 "앞으로 있을지도 모르는 관계다." 이건 나치 선전상 괴벨스가 즐겨 사용하던 어법이다.

어쨌든 아무 "증거"나 "근거"도 없이 이문열은 과감하게 총선연대를 중국 문혁기의 "홍위병"에 비유한다. 고약한 상상력이다. 총선연대의 활동의 근거는 국민주권을 명시한 우리 헌법의 참정권보장 조항에 있다. "시민들의 참여 없이 민주주의는 살아남을 수 없다." 독일의 대학교재에 나오는 말이다. 참여민주주의가 대의제와 함께 민주주의 문화를 지탱하는 또 하나의 기둥이라는 것은 현대의 상식이며, 이 상식은 이미 대부분의 나라에서 실천되고 있다. 그런데 왜 그의 상상력은 총선연대의 이미지를 찾아 민주국가가 아니라 하필 문혁기의 중국으로 달려가는 걸까? 이렇게 민주주의를 볼셰비즘과 동일시하는 것도 이미 히틀러가 한번 써먹었던 수법이다.

"증거"도 "근거"도 없기에 ''총선연대=홍위병''이라는 등식을 만들기 위해 그는 미래로 날아가야 했다. 즉 "총선연대는 앞으로 홍위병이 될 수도 있다. 그러니 조심하라." 말이야 맞는 말이다. 그의 말대로 총선연대는 "홍위병"이 될 수도 있고, 심지어 조직폭력배가 될 수도 있다. 여기서 총선연대는 아직 홍위병이 되어 보지도 못한 채 벌써부터 그 섬뜩한 이미지를 뒤집어쓰게 된다. 이데올로기는 이런 식으로 작동하는 법이다. 음모론(陰毛論)은 포르노다. 언젠가 이문열은 마광수를 질타했지만 정말로 부도덕하고 몰취향한 것은 바로 이 정치 포르노다.

제 본능을 적나라하게 표출하는 동물과 달리 인간은 그것을 합리적이며 논리적인 언어로 분절화할 수가 있다. 특히 그 일만 전문적으로 하는 사람을 흔히 문인이라 부른다. 이 점을 깜빡 잊은 이문열 씨에게, 이제 그의 말을 그대로 돌려주자. 아무쪼록 그 언어폭력에 속수무책으로 얻어맞는 사람들의 심정이 어떠한지 몸소 체험해보는 귀한 시간이 되었으면 한다.

"이문열 씨는 지금은 존경받는 소설가이지만 앞으로는 모 정당의 대변인이 되거나 그 당의 공천을 받을 수도 있다. 끊임없이 나도는 야합설에도 불구하고 물론 현재까지 이런 발언을 하는 이문열 씨가 정치권 일각의 사주를 받았다는 뚜렷한 증거는 나오지 않았을 뿐더러 그의 선의를 의심할 근거도 없다. 그런데도 그의 행각을 보면 자꾸 나치 친위대를 떠올리게 되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 그것은 아마도 그의 활동이 이제 시작이며, 정말로 중요한 전개와 변화는 앞날에 남아 있기 때문일 것이다."